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단 편집) === 그 외 피고 === ||<:>'''전범 이름'''|| '''역할''' ||<:>'''Ⅰ'''||<:>'''Ⅱ'''||<:>'''Ⅲ'''||<:>'''Ⅳ'''||<:>'''판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해서 오죽하면 변호사들도 이 사람 정신병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물론 정신병이 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원래 이 정도면 사형까지 가기는 무리였지만 연합국 측은 그가 나치 이념의 구성 및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라는 평가도 있다.]||<:>나치당 고위 간부 [br] 돌격대 대장 [br] 대중잡지 돌격병(Der Stürmer)의 사장||<:>I||<:>O||<:>O||<:>G||<:><|9>사형[br]([[교수형]])|| ||<:><#ffdbff>'''[[마르틴 보어만|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실종되어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치아이 노부히코나 [[고바야시 모토후미]]는 그가 살아서 네오 나치를 이끌고 있다는 소설/만화를 쓴 적이 있다. 나치 독일 시절 정보부대에서 근무하고 서독 성립 후 서독 정보기관 수장이 된 갤런은 보어만이 사실 소련의 첩자로서 소련에서 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1972년 그의 유골이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사망으로 판정. [[다운폴|몰락]](역사서와 영화 모두)에서는 1945년 5월 2일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나치당 [[비서실장]] [br] 돌격대 및 친위대 대장||<:>I||<:>O||<:>G||<:>G|| ||<:>[[한스 프랑크|한스 미하엘 프랑크]][* [[알베르트 슈페어]]와 더불어서 진솔하게 사죄한 나치 고위관리자 중 한 명이다. 알렉 볼드윈이 주연으로 나온 2000년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프랑크의 진솔함에 감명받은 프랑스 재판관이 살려주는게 어떻겠냐고(무기징역형) 제안하지만 소련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반대한다. 프랑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극렬 나치빠였고 뉘우치는 건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폴란드 총독부|폴란드]] 총독 [br] 돌격대 대장||<:>I||<:>O||<:>G||<:>G||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어느 문서에 서명했냐고 물어보면 죽어도 안 했다고 일관해서 변호인단은 그를 "Der Mann ohne Unterschrift" (the man without a signature, 즉 서명 없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국가중앙보안본부 대장.[* 전임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br] 친위대 대장 [br] 무장친위대 및 경찰대장.[*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I||<:>O||<:>G||<:>G|| ||<:>[[프리츠 자우켈|에른스트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프리츠 자우켈]][* 알베르트 슈페어의 죄까지 뒤집어썼다는 논란도 있다.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외국인 노동고용 전권 총감 [br] 돌격대 및 친위대 대장||<:>I||<:>I||<:>G||<:>G|| ||<:><#ffdbff>'''[[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거물 전범 중 하나다. 레온 골든손(Leon Goldensohn)의 뉘른베르크 인터뷰에서도 괴링이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앞장섰던 전범 중 하나로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오스트리아]] [[수상]]([[총리]])[br][[네덜란드]] [[총독]][* '''네덜란드의 도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지고 있었다.] [br] 친위대 대장||<:>I||<:>G||<:>G||<:>G|| ||<:><#ffdbff>'''[[빌헬름 프리크]]'''||<:>전(前)내무부 장관[* 그 후임이 하인리히 힘러.][br] 체코 총독[br] 뉘른베르크 인종 법 작성 참여.||<:>I||<:>G||<:>G||<:>G||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울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외무부 장관 [br] 친위대 대장||<:>G||<:>G||<:>G||<:>G|| ||<:><#ffdbff>'''[[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당 교육부장[br] 나치당 외교정책부장[br] 동유럽 점령지 관리 장관 [br] 돌격대 대장||<:>G||<:>G||<:>G||<:>G|| ||<:>[[발터 풍크|발터 에마누엘 풍크]][* 57년 석방]||<:>경제부 장관[br] 국가은행 총재||<:>I||<:>G||<:>G||<:>G||<:><|2>종신형|| ||<:>[[루돌프 헤스|루돌프 발터 리하르트 헤스]][* 처음 4가지 죄목 모두 기소당했으나 1941년에 영국으로 날아가 이후 줄곧 영국 측에 감금당했으므로 ~~덤으로 정신도 좀 헤까닥한 상황이었기에~~ 반인륜 전쟁범죄에 대한 범죄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재판부는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다.]||<:>퓌러 대리 [br] 돌격대 및 친위대 대장||<:>G||<:>G||<:>I||<:>I|| ||<:>'''[[발두어 폰 시라흐|발두어 베네딕트 폰 시라흐]]'''[* [[알베르트 슈페어]], [[한스 프랑크]]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친 자 중 한 명이다.]||<:>전(前)[[히틀러 유겐트]] 단장 [br] 돌격대 대장||<:>I||<:>O||<:>O||<:>G||<:><|2>20년형|| ||<:>[[알베르트 슈페어|베르톨트 콘라트 헤르만 알베르트 슈페어]][* 같은 임무를 맡았던 부하 프리츠 자우켈은 사형인데 이쪽은 20년형이라서 사법거래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다만 사형이 마땅할 정도의 반인륜 범죄에 적극 가담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판결 중 하나.]||<:>군수 & 탄약부 [[장관]]||<:>I||<:>I||<:>G||<:>G|| ||<:><#ffdbff>[[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54년 석방]||<:>전(前)외무부 장관.[* 그 후임이 리벤트로프.][br] 전(前)[[체코]] 총독.[* 그 후임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프리크임.] [br] 친위대 대장||<:>G||<:>G||<:>G||<:>G||<:>15년형|| ||<:>[[프란츠 폰 파펜|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전(前)수상(총리)[br]전(前)부수상(부총리)[br] [[오스트리아]] 대사[br] [[터키]] 대사||<:>I||<:>I||<:>O||<:>O||<:><|3>무죄|| ||<:>[[얄마르 샤흐트|얄마르 호러스 그릴리 샤흐트]][* 샤흐트는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재판 증언석에서도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응수했고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슈트라이허가 "전쟁에 반대한 유대인의 개이니 이제 훈장만 받으면 완벽하겠군!" 이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역시 "전쟁에 반대했으니 연합군 놈들이 황금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주겠구먼."이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헤르만 괴링이 박장대소했다고 하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훗날 서독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받았다.]||<:>전(前)경제부 장관[br] 전(前)국가은행 총재.[* 그 후임이 풍크.]||<:>I||<:>I||<:>O||<:>O|| ||<:>[[한스 프리체]][* 종적 직전 자살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신 기소되었다. 그런데 괴벨스의 위상이 너무 높았는지 정작 같이 기소당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리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단지 괴벨스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디오 해설자로 발탁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소리 대역이 전범재판에까지 대신 끌려온 셈이었다. 이 사람은 단지 괴벨스와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끌려온 것이며 대본에 써 있는 대로 읽었을 뿐이기 때문에 기소는 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선전부 라디오 방송부장||<:>I||<:>I||<:>I||<:>O|| ||<:><#ffdbff>'''[[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구스타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마리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1941년까지 [[티센크루프|크루프사]]의 최고경영자||<:>O||<:>I||<:>I||<:>I||<:>---[* 병으로 재판에 불참했으며 얼마 후 사망했다. 검사팀은 1943년 이후 최고경영자인 아들을 대신 재판에 앉히려고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거부하였다. 대신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하나인 크루프 재판에 넘겨져 12년형을 선고받았다.]|| ||<:><#ffdbff>'''[[로베르트 라이]]'''||<:>나치당 조직부장[br] 노동전선 지도자 [br] 돌격대 대장||<:>I||<:>I||<:>I||<:>I||<:>재판 전 자살|| 대리 판사 알렉산드르 볼치코프를 제외한 소련 수석판사는 독일로 인해 2,900만명의 사망자를 냈고 1000만의 부상자를 냈기 때문에 기소된 모든 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려고 했지만 영국, 미국, 프랑스 측의 반대에 부딪혀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루돌프 헤스도 사형시키길 바랬지만 결국엔 무기징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소련 측에서 반대의견을 따로 펴내는 것으로 끝냈다. 한스 프리체는 다른 전범들조차도 "쟤 누구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미미했고 얄마르 샤흐트 박사는 히틀러를 반대했다가 수용소까지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쯤 되면 나치가 그냥 싫어서 다 감옥에 넣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흐트는 애초에 무죄가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범재판을 걸어 '''재판이 승자의 철저한 보복 파티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샤흐트 본인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수석 판사 두 명(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미국 프랜시스 비들)이 샤흐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을 주장하자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이 "아니,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냐?"며 유죄를 주장한 두 판사에게 반박했다. 심지어 소련 측 대리 판사였던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판사는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에게 "이보시오, 동지. 저 사람이 왜 유죄입니까?"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영국 측 대리 판사 노먼 버킷은 프랜시스 비들에게 "이 사람아, 약 빨았어?" 라는 말을 던지며 비웃었다고 한다.] 다만 이 재판에서 무죄 방면된 피고인들은 모두 그대로 편안한 여생을 누리지는 못했다. 괴벨스의 선전성 심복이었던 한스 프리체의 경우 전범 혐의는 없어서 이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서는 독일(서독) 국내 법에 의한 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재판 이후 서독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프리체는 복역 중 암 발병으로 1950년에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1953년에 사망했다. 역시 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프란츠 폰 파펜도 마찬가지로 나치 부역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서독 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고 1954년까지 서독 내 공직 활동과 저작물 출판을 금지당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우파 성향인 기민당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실패했고 자신이 끝까지 히틀러 반대자였다고 주장하다가 1969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샤흐트는 서독 정부하의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1년만에 출소한 것을 제외하면 그래도 편한 여생을 보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샤흐트는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행정가라 죽기 전까지 여러 나라의 경제정책에 관여했고 서독 정부에서 건국 훈장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